"월 700만원 벌어봤어요"… 아들 셋 30대 주부는 어떻게 'AI 일꾼'이 됐나 [AI 시대, 노동의 지각변동]

AI 학습자료 제작 데이터 라벨러
AI가 만든 저숙련·고임금 일자리
문턱 낮아 장애인·시니어도 각광
공급 늘면서 일감 경쟁 치열해져

편집자주

인공지능(AI)은 인간 노동자를 돕게 될까요, 아니면 대체하게 될까요. AI로 인해 새로운 직업이 생기기도 했고, AI와 인간의 경쟁이 촉발되기도 했습니다. 이미 시작된 노동시장의 '지각변동'을 심층취재했습니다.
주부 데이터 라벨러 이유리씨(검정 상의) 가족이 1월 3일 전북 전주시 자택에서 일상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집안일과 데이터 라벨링 작업을 하는 이씨, 공놀이를 하는 삼 형제의 사진을 여러 장 찍은 다음 겹쳐 합성했다. 전주=정다빈 기자


인공지능(AI)의 일상 침투는 거침이 없다. 놀라움과 편리함을 넘어 이젠 위협적이기까지 하다. 특히 인간의 일자리를 넘보는 AI는 개인의 삶은 물론 노동시장의 획기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AI의 등장과 함께 새로운 일들이 생겨났고, 기술이 발전하면서 기존 일자리도 다양한 직군으로 빠르게 분화하는 중이다. 어떤 직업은 AI의 습격에 무방비 상태인 반면, 어떤 직업은 이미 AI와 주도권 다툼을 시작했다.

한국일보는 AI의 등장 이후 온몸으로 변화를 맞고 있는 다양한 직업 종사자들을 만나 그들이 처한 현실을 들으며 걱정과 기대에 공감했다. 또한 AI 발전을 주도하고 있는 국내외 기업들의 채용공고를 데이터베이스화하고 심층 분석해 AI 관련 일자리가 변화하는 흐름을 읽어냈다. 이를 토대로 국내외 전문가들과 함께 인간과 AI가 공존할 수 있는 '노동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지 그려봤다.

기술 발달에 따른 변화를 피할 수 없다면 늦지 않게, 지혜롭게 대응해야 한다. AI가 바꿔놓고 있는 '노동의 현재'를 들여다보는 게 그 첫걸음이다. AI의 등장과 함께 새로운 삶을 살게 된 한 평범한 이웃의 경험담으로 AI와 공존해야 할 노동시장의 현재와 미래 이야기를 시작한다.

한때는, 누구에게나 열린 고소득 일자리

주부 데이터 라벨러 이유리씨가 1월 3일 전북 전주시 자택 거실에서 라벨링 작업을 하고 있다. 전주=정다빈 기자


"아침에 애들 밥 먹여 학교 보내고, 다 치운 뒤에 오전 9시 전 컴퓨터 앞에 앉는 거예요. 그때부터 자기 전까지 일을 계속해요. 중간에 애들 학원 라이딩하고, 대기 시간에는 노트북 들고 다니며 일하고요. 일정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또 밥하고, 다시 컴퓨터 앞에 앉죠. 이렇게 해서 월 700만 원도 찍어봤어요."

전북 전주에 사는 주부 이유리(39)씨는 4년 차 '데이터 라벨러'다. AI가 제 역할을 하려면 데이터 학습이 필요한데, 이씨가 이 학습을 시킨다. 예를 들어 AI가 바나나를 식별하기까지는 여러 사진 속에서 무엇이 바나나인지 알려주는 학습 과정을 수없이 반복해야 한다. 이때 사진(데이터)에서 바나나를 찾아 표시해(라벨링) AI가 학습할 수 있는 자료를 만드는 사람이 바로 데이터 라벨러다.

이유리씨의 작업대. 마우스와 키보드, 매직패드를 넘나드는 손가락의 궤적을 장노출로 담았다. 전주=정다빈 기자


이 일을 하기 전까지 이씨는 요식업을 하는 남편 옆에서 육아와 살림을 도맡느라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 경력 단절 상태였다. 그러다 우연히 AI 일을 알게 됐다. 아이들이 학교에 있는 동안 할 수 있는 부업거리를 찾다가 한 유튜브 영상을 본 것이다. 편의점에서 특정 물품을 찾아 사진을 찍어 올리면 돈을 준다는 내용이었다. 이씨는 "한 달에 몇십만 원이라도 벌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라벨링은 집에서 휴대폰이나 컴퓨터만 있으면 되니 좋은 기회였다"고 회상했다.

일은 쉬웠다. 참여하는 프로젝트마다 사전에 제공된 작업 매뉴얼을 따라 사진 속 목표물에 네모를 그린다거나, 줄을 긋는다거나 하는 등의 단순노동이주였기 때문이다. 그 옛날 부업거리에 빗대 '디지털 인형 눈 붙이기'라는 별칭이 붙은 이유가 있었다. 점점 돈을 벌기 시작하자 이씨는 아예 거실 한편에 작업대를 마련했다. 아이들을 돌봐야 하거나 집안일을 병행해야 할 때 일을 하면서도 전혀 무리가 없었다.

이유리씨가 1월 3일 전북 전주시에서 데이터 라벨링 작업을 하다 잠시 멈추고 아들을 학원에 데려다주기 위해 운전을 하고 있다. 전주=정다빈 기자


모니터, 키보드, 마우스뿐이던 작업 도구들도 조금씩 업그레이드해가며 숙련도를 끌어올렸다. 여러 프로젝트에 동시에 참여하며 하나에 수십 원짜리 작업물을 수만 개씩 처리하기에 이르렀고, 수입도 쭉쭉 올랐다. 이씨는 "살림만 할 땐 자존감이 많이 낮아졌는데, 일을 하면서 소속감도 들고 자부심도 생겼다"며 "주변 엄마들에게도 적극 추천했다"고 말했다.

진입 문턱이 낮은 데 비해 비교적 고수익을 올릴 수 있고, 장소와 시간에 구애 없이 원하는 만큼 일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데이터 라벨러 시장은 점점 입소문을 탔다. '투잡'으로 데이터 라벨링을 시작했던 김지한(가명·37)씨도 하던 부동산 관리 일을 접고 이 일에 전념 중이다. 1년 동안 수천만 원을 벌어들인 적도 있다는 김씨는 "하루에 8시간 정도 작업하는 편인데, 더 벌고 싶으면 더 하면 된다"고 말했다.

지체장애인 데이터 라벨러 최용주씨가 지난해 12월 22일 서울 마포구 사무실에서 라벨링 작업을 하고 있다. 오지혜 기자


데이터 라벨링은 특히 일자리에 갈급했던 주부, 시니어, 장애인 등에게 인기가 많다. 이들을 대상으로 라벨러 육성 교육을 하는 단체도 있다. 중증 지체장애로 다리가 불편한 최용주(49)씨는 서울시지체장애인협회를 통해 한 데이터 회사와 계약을 맺고 반 년가량 라벨러로 일해왔다. 이미지부터 텍스트까지 작업물의 종류를 가리지 않아 월 200만 원씩은 꾸준히 벌었다. 최씨는 "의지만 있으면 접근하기 쉽다는 게 이 일의 최대 장점"이라며 "최근 각광받는 AI를 직접 학습시키는 역할이라는 생각에 뿌듯함도 크다"고 했다.

요즘은, 일감 끊길까 전전긍긍

데이터 라벨링 플랫폼인 크라우드웍스 홈페이지에서 간단한 데이터 라벨링 기법인 '바운딩' 실습이 진행되고 있다. 크라우드웍스 홈페이지 캡처


하지만 요즘 들어 상황이 달라졌다. 사람이 몰려들면서 일거리 확보 싸움은 치열해지고 단가 하락은 자연스러운 수순이 됐다. 게다가 데이터 라벨링 시장 수요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던 정부의 데이터 댐 사업1이 축소되면서 일거리는 더 쪼그라들었다. '라벨링 보릿고개'라는 말까지 나왔다. 이씨는 "일감을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졌다"며 "작년엔 전년 수입의 절반도 못 벌었다"고 토로했다.

라벨러 대부분은 사회적 안전망이 없는 프리랜서 신분이라 일감 감소 타격이 더 클 수밖에 없다. 라벨러를 그만뒀다는 박강일(가명)씨는 "누구나 할 수 있는데 고수익을 올린대서 시작했지만, 최저시급조차 벌기 어려웠다"면서 "결국 다른 회사에 취직했다"고 말했다. 김씨도 "일감이 끊길까 봐 수시로 데이터 라벨링 플랫폼들을 돌아본다"며 "실상은 긍정적이지만은 않다"고 씁쓸함을 삼켰다.

1데이터 댐 사업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AI 학습용 분야별 데이터를 대규모로 구축해 무료로 개방하기 위해 2017년부터 진행하고 있는 사업.
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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