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보면]남편 인공호흡기 뗀 아내 살인죄, 의사 살인방조죄(上)

[알고보면]남편 인공호흡기 뗀 아내 살인죄, 의사 살인방조죄(上)

영화 '소풍'으로 돌아보는 존엄사 논란
1942년부터 조력자살 허용한 스위스
고령 이유로 처음 안락사 택한 구달 박사
日, 이즈미·가와사키 병원 사건으로 논란 일어
영화 '소풍'에서 고은심(나문희)은 노쇠하다. 파킨슨병에 걸려 툭하면 손목을 떤다. 종종 아들 송해웅(류승수) 얼굴을 알아보지도 못한다. 사돈이자 친구인 진금순(김영옥)의 처지도 다르지 않다. 매일같이 밭일한 탓에 허리 병을 달고 산다. 때때로 움직일 수 없을 만큼 고통이 찾아와 이부자리에 용변을 본다.

영화 '소풍' 스틸 컷


이들은 가족에게 폐 끼치기도 싫지만 자기를 잃은 채로 살게 될까 두려워한다. 죽음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갖길 소망한다. 학창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의 말로가 결정적 계기로 작용한다. 요양병원으로 옮겨진 삶을 고려장에 비유한다. 간병인의 돌봄을 억압과 회유로 인식하며 자기 처지를 비관한다.

많은 사람이 기본적인 생리 현상을 다른 사람에게 의존해서 살아가는 상태를 존엄이 훼손된 삶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주변을 조금만 둘러봐도 많은 중증 환자, 노인, 장애인들이 배설을 스스로 해결할 수 없어서 도움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과연 그들의 삶에 존엄이 사라졌다고 할 수 있을까.

사회학자 우에노 지즈코는 저서 '집에서 혼자 죽기를 권하다'에서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모두가 중도 장애인이 되어가는 과정이고, 그 중도 장애 안에는 불편한 몸뿐만 아니라 머리와 마음, 그 전부 또는 일부가 존재한다"고 설명했다. 치매에 대한 공포의 대안으로 안락사를 제시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며 "그런 생각의 배후에는 '살아 있을 가치'가 있는 생명과 없는 생명을 구별하는 생각이 깔려 있다"고 지적했다.

이지은 작가는 공동 저자로 참여한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에서 오랫동안 치매 돌봄의 현장을 연구해온 학자들의 발견을 소개하며 다음과 같이 썼다. "자아의 일부분을 구성하는 어떤 것들은 치매로 인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이전 삶의 흔적들을 가진 몸의 사소한 행동들이 사실은 그 사람의 삶을 이어가는 방식이다." 사람의 몸이 그저 손상된 뇌를 담는 그릇은 아니라는 뜻이다.

존엄은 그렇게 이어지는 삶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다. 물론 손상된 삶의 의미를 다르게 바라볼 수 있게 됐다고 해도, 상황 자체가 주는 비애는 피할 길이 없다. 특히 가족이라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면서도 막막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영화 '소풍' 스틸 컷


안타깝게도 고은심과 진금순은 그런 돌봄을 기대할 수 없다. 서로를 돌보는 삶에서도 한계를 절감했다. 그래서 향하는 종착역은 무척이나 파격적이다. 개인의 자기 결정에 의한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 우리 사회 분위기와 동떨어져 있다.

무엇이 정답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개인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음을 맞고 싶은지에 대한 바람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것들을 우리 사회가 전부 인정해줄 리는 만무하다. 하지만 적어도 큰 테두리 안에선 개인이 맞고 싶은 존엄한 죽음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소풍'이 될 수 있으므로….

'알고 보면' 좋을 정보를 두서없이 전달한다. 영화를 흥미롭게 관람하는 팁이다.

*우리나라에서 존엄사법은 2018년 2월부터 시행된 연명의료결정법(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이다.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가 심폐 소생술, 인공호흡기, 혈액 투석, 항암제 투여 등의 연명의료가 무의미하다고 느끼고 원치 않으면 이를 중단할 수 있도록 한다. 소극적 안락사와 적극적 안락사까지 존엄사로 보는 관점에서 이는 가장 낮은 단계의 존엄사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적용 대상에 대해서도 말기 환자나 식물인간 상태가 아닌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로 매우 좁게 정해놓았다.

*소극적 안락사는 식물인간 상태처럼 의식이 없는 환자에게 영양 공급 같은 생명 유지에 필요한 치료를 중단해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대표적 사례로는 2005년 3월 미국의 테리 샤이보 사건이 자주 언급된다. 15년간 식물인간 상태로 있던 테리 샤이보라는 여성이 영양 공급 튜브를 제거하라는 법원의 판결에 따라 숨지게 됐다.

*적극적 안락사는 말기 환자나 식물인간 상태의 환자에게 영양 공급이나 치료를 중단하는 소극적인 행위를 넘어 의사 등 타인이 치명적인 약을 처방하거나 주입함으로써 생명을 단축하는 방식이다.

영화 '소풍' 스틸 컷


*조력자살은 회복할 가능성이 없는 말기 환자가 고통을 덜기 위해 의사에게서 치명적인 약이나 주사를 처방받아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를 말한다. 환자가 극약 처방 같은 의사의 도움을 받더라도 복용을 직접 해야 한다는 점에서 적극적 안락사와 구분된다. 유럽에선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자신들이 자행한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에 안락사라는 단어를 악용한 까닭에 '조력자살'과 '적극적 안락사'를 엄격히 구분해 사용한다.

*스위스 조력자살 지원단체인 디그니타스는 조력자살을 한 한국인이 2016년에 처음 있었다고 밝혔다. 이는 한국인이 해외에서 조력자살을 선택한 첫 사례로 전해진다.

*스위스는 1942년부터 자국민은 물론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조력자살을 허용하고 있다. 긴 찬반 논의가 있었으나 2006년 스위스 연방대법원이 안락사를 최종적으로 인정하면서 논란이 마무리됐다. 현재 스위스에선 디그니타스, 이터널 스피릿, 엑시트 인터내셔널 같은 단체들이 외국인 조력자살을 돕고 있다. 이 가운데 엑시트 인터내셔널은 2018년 104세였던 호주 식물학자 데이비드 구달의 안락사를 도운 곳으로 유명하다. 당시 구달은 특별히 아픈 데가 없는데도 존엄한 죽음을 맞겠다며 공개적으로 스위스행을 알렸다. 2018년 4월 집에 혼자 있다가 크게 부상했는데 이틀 동안 일어나지 못하면서 혼자만의 힘으로 생활하는 것이 힘들어졌다고 판단했다. 그는 삶을 마감하기 전날 바젤의 작은 호텔에서 생애 마지막 기자회견을 했다. "마지막 1주일을 가족과 함께 보내서 기쁘다. 하고 싶은 일이 많이 있지만, 너무 늦었다. 그것들을 남겨두고 떠나는 것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마지막 순간 듣고 싶은 음악을 골라달라는 질문에는 "그런 것은 없다. 하지만 골라야 한다면 베토벤 9번 교향곡 '합창'의 마지막 악장이 될 것"이라며 '환희의 송가' 몇 소절을 독일어로 힘차게 불렀다. 이튿날 구달은 의료진과 손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치사량에 해당하는 신경안정제를 맞고 숨을 거뒀다. 주사액을 정맥 안으로 주입하는 밸브는 자기 스스로 열었다. 모든 과정은 영상으로 녹화됐다. 그는 "장례식은 치르지 말라. 나를 기억하려는 어떤 추모 행사도 갖지 말라. 시신은 해부용으로 기증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엑시트 인터내셔널의 창립자 필립 니츠케는 "불치병이 아니라 고령을 이유로 안락사를 택한 건 내가 아는 한 구달 박사가 최초의 사례"라고 밝혔다.

*영화 '미 비포 유'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전신마비가 된 남자 주인공은 삶을 마무리하기 위해 영국을 떠나 스위스로 찾아간다.

*디그니타스에서 안락사는 ▲입실 뒤 가족과 마지막 작별 인사 ▲의사 진단서 등 안락사에 필요한 서류 최종 확인 ▲수차례에 걸쳐 환자에게 안락사 진행 의사 확인 ▲환자 스스로 약 복용 ▲사망 확인 순으로 진행된다. 그 뒤에는 ▲가족에게 안락사 뒤 과정 설명 ▲경찰·법의학자의 타살 및 자발적 안락사 여부 등 확인 ▲입관 ▲운구 차량으로 이동 ▲화장장 등이 차례로 이어진다.

*스위스 연방정부는 20세기 초 자살을 범죄로 규정하지 않았다. 자살을 돕는 행위 또한 처벌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자녀가 재산을 빨리 상속받으려는 의도로 부모의 자살을 돕는 일 등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자, 1942년 악용을 막고자 일부 처벌 조항을 담은 형법 115조를 제정했다. 스위스에선 오래전부터 관습적으로 조력자살이 이뤄져 왔는데, 존엄사의 의미로서 조력자살을 명시한 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가를 정의하는 법적 규정이 없었던 셈이다. 다만 1942년부터 효력이 발생한 형법 115조에 '이기적인 동기로 타인의 자살이나 자살 시도를 유발하거나 조력해, 만일 그 타인이 실제로 자살하거나 자살을 시도했다면 5년 이하 징역이나 벌금형에 처한다'고 명시돼 있어 이를 조력자살의 근거로 삼고 있다. 이는 영리를 취하는 등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자살을 도운 게 아니라면 처벌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그래서 디그니타스 창립자 루드비히 미넬라가 검찰에 기소됐을 때도 주요 혐의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조력자살로 이끌었느냐가 아니라, 조력자살을 돕는 과정에 영리 목적이 있었는가였다. 스위스에서 조력자살이 허용되는 근거 역시 관련 조항에 있는 게 아니라 이를 규제하거나 처벌하는 조항이 없다는 데 있다.

영화 '소풍' 스틸 컷


*개인의 자율성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스위스는 법에 최소한의 원칙만을 정한다. 그 안에서 모든 것을 허용하는 사회·문화적 분위기가 강하다. 그런 구조 속에서 디그니타스 같은 외국인 조력자살 지원단체가 설립될 수 있었던 것인데, 모든 것을 법으로 세세히 규정하는 우리나라 관점에서 보면 '법적 공백'처럼 비칠 수 있다.

*한국의 형법은 자살을 죄로 규정하진 않지만, 자살교사와 자살방조는 죄로 규정한다. 다만 스위스와 달리 '동기'로 죄의 유무를 구분하지 않아 조력자살이 허용될 틈이 없다. 한국에서 환자가 간절히 죽음을 원해 의사가 '선의'로 치사약을 처벌해도 예외 없이 처벌되는 건 이 때문이다.

*스위스에서는 1998년부터 2019년까지 22년간 외국인 3027명이 디그니타스를 통해 생을 마감했다. 독일과 영국, 프랑스 등 안락사가 금지된 주변 나라에서 안락사를 원하는 사람이 스위스로 넘어오는 일이 빈번해졌다.

*스위스에서 가장 큰 조력자살 지원단체는 엑시트다. 1982년 설립돼 자국민만 회원으로 받고 있다. 회원 수는 10만 명이 넘는다. 스위스 전체 인구의 1% 이상이다.

*2011년 5월 스위스 취리히주 의회는 조력자살 자체를 금지하고, 외국인에게도 조력자살을 허용하지 않는 법안을 상정했다. 하지만 취리히주 시민의 85%와 78%가 각각 반대표를 던져 기존 법안으로 유지하게 됐다.

*디그니타스가 검찰에 기소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회원들에게 회비와 후원을 받는다는 점이었다. 이것이 이익을 보는 행위가 아니냐는 지적이 잇따랐다. 조력자살을 신청하려면 우선 회원이 돼야 하는데, 최초 가입비는 200프랑(30만 원)이다. 매년 최소 80프랑(12만 원)의 연회비를 내야 회원 자격이 유지된다. 조력자살을 하려면 별도 비용이 든다. 조력자살에 필요한 의사 진단과 약 처방에서부터 사후 장례 및 행정 처리 등을 포함해 1만500프랑(1592만 원) 정도가 필요하다고 전해진다. 디그니타스는 비용 항목을 공개하고 있는데, 조력자살을 도와줄 의사를 찾는 데 가장 큰 비용(4000프랑)이 든다고 설명한다.

영화 '플랜 75' 스틸 컷


*스위스가 조력자살을 허용한 건 개인의 자기 결정권을 존중하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만은 아니다. 높은 자살률도 배경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완벽히 막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비교적 인간답게 죽는 방법을 열어주자는 여론이 법과 제도를 바꿨다. 실제로 스위스에선 2012년부터 2016년까지 열차 투신자살이 매년 100건 이상 발생했다. 그 이전에는 총기 자살도 이슈였다. 스위스의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11.1명(2019년 기준)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나라들의 평균이다. 1위는 24.1명(2020년 기준)의 한국이다. 2위 리투아니아의 20.3명(2020년 기준)보다 3.8명 많다.

*적극적 안락사와 조력자살을 모두 허용하는 대표적인 나라는 네덜란드다. 전 세계 최초로 안락사와 조력자살을 합법화했다. 네덜란드는 1886년 형법을 처음 제정할 때 안락사를 범죄로 규정했으나 다양한 법원 판결을 거쳐 2002년 4월 안락사법을 시행했다. 물론 합법화되기 전에도 안락사는 관행적으로 이뤄져 왔다. 네덜란드에서 안락사를 선택한 사람은 2002년 1882명에서 2017년 6585명으로 꾸준히 증가하다가 2018년 6126명, 2019년 6351명으로 조금 감소했다. 그래도 여전히 안락사는 네덜란드 전체 사망자의 약 4%를 차지한다. 2020년 10월에는 안락사 허용 대상의 범위를 말기 질환을 앓고 있는 12세 이하 아동으로 확대하기도 했다.

*벨기에 역시 2003년 적극적 안락사와 조력자살을 합법화했다. 가톨릭 나라로는 네덜란드에 이어 두 번째다. 2018년에 인구 1100만 명인 벨기에에서 안락사를 선택한 이는 2358명이었다. 하루 평균 여섯 건 정도다. 이들 중 80세 이상은 40% 이상이었으며, 대부분이 60세 이상이었다.

*룩셈부르크에서도 안락사를 위한 법이 2009년 통과했다.

*캐나다는 퀘벡주만 안락사를 허용하지 않고 조력자살만 허용한다. 다른 주는 안락사와 조력자살을 모두 인정한다.

영화 '플랜 75' 스틸 컷


*미국에서는 1997년 오리건주가 처음으로 6개월밖에 살 가능성이 없는 환자들에게 조력자살을 허용했다. 그 뒤 콜로라도, 캘리포니아, 몬태나, 버몬트, 워싱턴 주와 워싱턴 DC가 합법화했다. 2018년과 2019년에는 하와이와 뉴저지, 메인주에서도 차례로 조력자살을 허용했다. 호주는 빅토리아 주만 2019년부터 조력자살을 허용한 법을 시행하고 있다.

*영국에서는 2015년까지 조력자살 법안이 네 차례나 올라갔으나 의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생명 윤리에 어긋난다는 영국성공회와 유대교, 이슬람 지도자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문턱을 넘기지 못했다.

*우리나라에서 존엄사 논쟁을 처음 촉발한 건 1997년 보라매병원 사건이다. 뇌 수술을 받고 자가 호흡을 못 하게 된 환자를 배우자의 요구에 따라 병원에서 퇴원시켰다. 인공호흡기를 뗀 환자가 곧바로 사망하면서 담당 의사들은 살인죄로 기소됐다. 이 사건은 당시 의사들에게 큰 충격을 줬다. 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를 돌려보냈다가 자칫 살인죄를 쓸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2004년 5월 대법원은 담당 의사와 레지던트에게 살인죄가 아닌 살인방조죄로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그들이 살인 행위를 도운 점은 인정된다고 보면서도 "퇴원을 허용한 것은 환자의 생사를 가족의 보호 의무 이행에 맡긴 것에 불과하므로 살인죄로는 처벌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아내는 항소심에서 부작위에 의한 살인죄가 인정돼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상고를 포기했다. 윗사람의 지시에 따라 인공호흡기를 뗀 인턴만 무죄를 인정받았다.

*2008년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는 뇌 손상으로 식물인간 상태에 빠진 할머니의 연명의료를 중단해달라는 가족들의 간곡한 요청이 있었다. 병원에서는 끝까지 환자의 생명을 보호해야 한다며 몇 개월이고 연명의료를 이어갔다. 할머니의 자식들이 인공호흡기를 제거해달라고 요청했으나 병원에서 계속 받아들이지 않았다. 가족들은 그해 5월 법원에 '무의미한 연명치료 장치 제거' 가처분신청을 냈다. 6월 병원을 상대로 민사소송도 제기했다. 가처분신청은 기각됐으나, 민사소송에서는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라"는 첫 존엄사 판결을 끌어냈다. 재판부는 "생명의 연장을 원하지 아니하고 인공호흡기의 제거를 요구하는 환자의 자기 결정권 행사는 제한되지 아니하고 이를 거부할 수 없다. 이에 따른 인공호흡기 제거 행위는 응급의료 중단의 정당한 사유가 있는 것으로 의사는 민형사상 책임을 부담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병원에서 항소를 제기하면서 할머니의 연명의료는 이듬해 6월까지 14개월간 이어졌다. 2009년 5월 대법원이 최종적으로 존엄사를 인정하면서 그해 6월 23일 할머니는 인공호흡기를 뗐다. 인공호흡기를 떼면 곧바로 사망할 것이라는 병원의 예측과 달리 할머니는 자가 호흡하며 200여 일을 더 살다 해를 넘겨 임종했다. 의식불명이 된 지 1년 10개월 만이었다.

*일본에서는 본인 혹은 본인의 의사를 대행하는 타자가 죽음에 이르는 약물 등을 투여하는 것을 보통 '안락사'라고 표현한다. 한편 본인의 의사로 연명치료를 거부하고, 완화 케어를 적절히 받으며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존엄사' 혹은 '소극적 안락사'라고 일반적으로 표현한다. 일본에서는 이 안락사와 존엄사의 정의를 폭넓게 이용한다. 이 정의에 따르면 존엄사는 연명치료 없이 자연사하는 것을 가리키고, 생명 유지에 필요한 치료를 중지할 수는 있어도 치사약 투여 및 의사의 자살 방조는 그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다.

영화 '플랜 75' 스틸 컷


*일본에서는 이즈미 시민병원 사건으로 존엄사 논란이 빚어진 바 있다. 2000년부터 2005년까지 회복 전망이 없는 의식불명 환자 일곱 명의 인공호흡기를 제거해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이다. 일곱 명 가운데 한 명은 가족을 거쳐 본인의 동의를 얻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다른 여섯 명은 동의 기록이 없었다. 비슷한 사건은 가와사키에서도 있었다. 가와사키 협동병원의 한 의사는 1998년 기관지 질식과 심정지를 일으킨 공해병 환자의 기관 내 튜브를 가족의 동의를 얻어 뽑았다. 그는 환자가 괴롭게 호흡을 시작하자 근이완제를 주사해 사망에 이르게 했다.

*엄밀히 따지면 스위스와 미국에서 행하는 안락사는 의사가 환자에게 치사약을 처방해 환자 스스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자살 방조에 가깝다. 다른 나라나 지역에서는 의사가 환자에게 치사약을 투여해 안락사하는 방법을 선택한다.

*호주 빅토리아주에서는 안락사가 법제화되면서 필립 니스케 박사가 캡슐형 안락사 장치 '사르코'를 개발해 화제가 됐다. 버튼을 누르면 캡슐 내에 액체 질소가 차올라 순식간에 인간이 살 수 없는 낮은 산소 농도 환경을 만들어 안에 있는 이를 사망하게 한다. 디자인이 세련되어서 자살을 미화한다는 비판이 많다.

참고 자료 : 유영규·임주형·이성원·신융아·이혜리 지음·발행처 북콤마 '그것은 죽고 싶어서가 아니다(2020)', 오쿠 신야 지음·이소담 번역·발행처 알에이치코리아 '모두가 늙었지만 아무도 죽지 않는다(2023)', 마르셀 랑어데이크 지음·유동익 번역·발행처 꾸리에 '동생이 안락사를 택했습니다(2020)', 신아연 지음·발행처 책과나무 '스위스 안락사 현장에 다녀왔습니다(2022)', 로널드 드워킨 지음·박경신·김지미 번역·발행처 로도스 '생명의 지배영역: 낙태, 안락사 그리고 개인의 자유(2014)', 댄 모하임 지음·노혜숙 번역·이일학 감수·발행처 아니마 '내 삶을 완성하는 더 나은 죽음(2012)', 김희경 지음·발행처 동아시아 '에이징 솔로(2023)' 등.

초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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